넵스키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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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넵스키 대로(러시아어: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 문화어: 녜브스끼 거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간선 도로로, 도시의 역사, 문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어, 18세기에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과 해군성을 연결하는 도로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고전주의와 절충주의 건축물이 들어서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20세기에는 소련 시대와 현대에 걸쳐 여러 차례 이름이 변경되기도 했다. 현재는 다양한 상점, 유흥 시설,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위치해 있으며, 카잔 대성당, 징거 하우스, 옐리세예프 백화점, 아니치코프 다리 등 주요 명소들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넵스키 대로는 러시아 문학 작품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하며, 특히 니콜라이 고골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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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리 - 페테르고프
페테르고프는 표트르 1세가 건설한 궁전과 정원으로 유명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서쪽 도시로, 독특한 분수 시스템과 역사적인 산업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관광 명소이자 과학 도시로 기능한다.
넵스키 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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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공식 명칭 | 네프스키 대로 |
로마자 표기 | Nevskiy prospekt |
이전 명칭 | 10월 25일 대로 |
위치 | 상트페테르부르크 |
좌표 | 59°56′N 30°21′E |
주요 특징 | |
길이 | 약 4.5 km |
폭 | 다양한 폭 |
주요 랜드마크 | 겨울 궁전 궁전 광장 카잔 대성당 구 해군성 구세주 흘린 피 성당 스트로가노프 궁전 아니치코프 다리 예카테리나 2세 동상 러시아 국립 도서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엘리세예프 상점 싱어 하우스 모스크바 역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
역사 | |
건설 시작 | 1712년 |
완공 | 1725년 |
주요 사건 | 1917년 러시아 혁명 관련 시위 및 집회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포격 현대 러시아의 주요 축제 및 행사 개최지 |
교통 | |
지하철 | 네프스키 프로스펙트 역 (모스크바-페트로그라츠 선) 고스티니 드보르 역 마야콥스카야 역 플로샤디 알렉산드라 넵스코고 역 |
버스 | 다양한 노선 운행 |
트롤리버스 | 다양한 노선 운행 |
문화적 중요성 | |
관련 작품 |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소설 네프스키 대로 (소설) 다양한 문학, 영화, 음악 작품의 배경 |
기타 | |
중요 건물 | 싱어 하우스 스트로가노프 궁전 엘리세예프 상점 카잔 대성당 구세주 흘린 피 성당 러시아 국립 도서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
2. 역사
넵스키 대로는 18세기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과 함께 탄생했다. 표트르 대제의 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성과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을 연결하는 도로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넵스키 대로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습지와 숲이 우거진 지역을 개간하여 도로를 만들었고, 1710년대 후반에 넵스키 대로라는 이름이 나타났다.[4]
18세기 동안 넵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도로로 발전했다. 안나 이오안노브나 시기에는 도로가 개조되고 개선문이 세워졌으며, 미하일 젬초프가 설계한 복된 동정녀 마리아 탄생 교회가 건설되었다.[1] 1736년과 1737년 두 차례의 화재로 많은 목조 건물이 파괴된 후, 석조 건물 건설이 시작되었다.[1][6] 표트르 예로프킨이 이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물 위원회는 넵스키 대로를 해군성 "삼지창"의 일부로 승인하여 도시 중심부의 지위를 굳혔다.[7]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시기에는 아니치코프 궁전, 스트로가노프 궁전 등 궁전 건축이 시작되었고, 도로 포장과 조경에도 힘썼다.[1] 18세기 후반에는 고스티니 드보르, 시 두마 건물 등 상업 시설과 다양한 종교의 교회들이 건설되었다.[1]
19세기 초, 고전주의 시대에 넵스키 대로의 최종 설계가 완성되었다. 카잔 대성당이 건설되고, 미하일 쿠투조프와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 장군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카를로 로시가 설계한 궁전 광장, 예술 광장, 오스트로프스키 광장 앙상블이 넵스키 대로와 연결되었다.[8][9]
19세기 중반, 절충주의 시대에는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과 같은 건물이 건설되고, 아파트 건물과 "통로"라고 불리는 새로운 유형의 상점이 등장했다.[11]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넵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제, 문화, 기술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차 철도, 트램, 버스 등 대중교통이 발전하고, 모던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은행, 보험 회사 등 다양한 회사들이 넵스키 대로에 자리 잡으면서 도시의 비즈니스 및 금융 중심지로 성장했다.
20세기 초, 싱어 회사 건물, 엘리세예프 형제 상업 하우스 등 모던 양식의 건물들이 건설되었다.[1]
소련 시대에는 넵스키 대로의 이름이 "프롤레트쿨트 거리"를 거쳐 "10월 25일 거리"로 바뀌었다가, 레닌그라드 봉쇄가 끝난 1944년에 ''넵스키 대로''라는 이름을 되찾았다.[17][21] 봉쇄 기간 동안 넵스키 대로의 일부 벽에는 포격 시 위험을 경고하는 비문이 새겨졌다.[18]
현대에 들어 넵스키 대로는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 거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부 역사적인 건물들이 해체되고 재건축되는 과정을 겪었으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는 대대적인 재건축이 이루어져 보도 포장, 통신 및 엔지니어링 네트워크 등이 개선되었다.[14] 넵스키 대로는 새해, 전승절, 도시의 날 등 주요 축제 때 보행자 구역으로 바뀌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된다.[15]
2. 1. 18세기
넵스키 대로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도로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1726년 상원 칙령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가는 주요 도로가 되었고, 1720년대에는 해군 제독 정원을 따라 도로 초기 구간에 자작나무 4줄을 심고 돌을 깔아 조경했다. 1723년에는 러시아 최초로 오일 램프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나중에는 벤치도 설치되었다.[1]
1732년 안나 이오안노브나의 궁정이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면서 대로는 개조되었고, 두 개의 개선문이 세워졌다. 현재의 카잔 대성당 앞 공원 부지에 미하일 젬초프 설계로 1733~1737년에 세워진 복된 동정녀 마리아 탄생 교회가 건설되었고, 1730년에는 루터교 성 베드로 교회가 나타났다.[1]
1736년과 1737년, 두 차례의 화재로 넵스키 대로의 많은 목조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이후 더 이상 나무집이 건설되지 않았다.[1][6]
1739년부터 주요 석조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표트르 예로프킨 지휘 하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물 위원회는 넵스키 대로를 해군 제독 "삼지창"의 일부로 승인하여, 도시 중심부의 지위를 굳혔다.[7] 건물들은 젬초프가 개발한 표준 "모델" 도면에 따라 건설되었다.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시기에는 아니치코프 궁전(1741년 착공, 1750년대 완공)과 스트로가노프 궁전(1752년 화재 후 재건) 등 궁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1756년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칙령에 따라, 시민들이 옷을 나무에 걸어 말리는 것이 금지되었고, 포장도로는 다양한 모양의 돌로 포장되었다.[1]
1762년, 안드레이 크바소프가 이끄는 도시 계획 위원회는 넵스키 대로변 건물들을 "하나의 연속적인 파사드"로 정비했다. 고전주의 양식이 도입되었고, 치체린 하우스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1780년 상트 카테리나 아르메니아 교회, 1783년 가톨릭 성 카테리나 교회 등 다양한 종교의 교회들도 건설되었다.[1]
18세기 후반에는 고스티니 드보르(1761~1785년 건설), 실버 로우(1787년 개장), 시 두마 건물 등 상업 시설도 등장했다.[1]
18세기 말까지 폰탄카 너머의 고속도로 양쪽이 거의 건설되었고, 즈나멘스카야 교회(1765년) 등이 건설되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라브라 앙상블도 1790년 삼위일체 대성당 건설로 완성되었다.[1]



2. 1. 1.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대
1704년 9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성이 네바 강 좌안에 세워진 후, 인근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Rue Bolchaïa Morskaïa|볼샤야 모르스카야|프랑스어 거리와 Rue Malaïa Morskaïa|말라야 모르스카야|프랑스어 거리 지역에는 선박 장인들의 정착촌이 나타났고, 궁전 광장 부지에는 "바다" 시장이 나타났다. 해군성 근처는 도시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된 지역 중 하나였다.[1]1710년대 초, 수도원이 네바 강 좌안에 나타났다. 당시에는 1240년 노브고로드 공작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스웨덴을 격파한 네바 전투가 그곳에서 벌어졌다고 추정되었다. 수도원 근처에는 노동자와 하인들을 위한 여러 부속 건물이 있는 정착촌이 있었다.[1]
두 도시 중심지를 내륙의 구 노브고로드 길(현재의 리고프스키 대로 노선과 대략 일치)과 연결하기 위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습한 숲을 통과하는 개간지[1] 건설이 시작되었다. 가장 습한 지역은 현대의 카잔 성당, 미하일롭스카야 거리, 특히 리고프스키 대로와 알렉산드르 넵스키 라브라 사이 지역으로, 연속적인 늪지대였다.[2] 1712년에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노브고로드 길까지 도로를 포장하기 시작했고, 1718년까지 완료되었다. 늪지대를 극복하기 위해 숲을 베어내고 나무 그루터기를 뽑아낸 후, 배수로를 파고 사석을 깔고 모래로 덮었다. 비교적 어려운 구간("수도원")이 먼저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1]
모이카에서 폰탄카까지 고속도로의 첫 번째 구간은 1710년부터 1715년까지 포장되었고, 그 후 모이카에서 해군성까지 구간에서 작업이 계속되었다.[1] 글루호이 운하(현재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따라 현재의 사도바야 거리까지 이른바 재정착촌이 생겨났다.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여제의 정원이 있던 대로의 왼쪽은 보초병이 지켰다. 1721년부터 1723년까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여제를 위해 폰탄카 강둑에 석조 궁전이 세워졌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탈리아라는 이름의 규칙적인 정원이 조성되었다.[1]
넵스키 대로는 1710년대 후반에 나타났다. 해군성과 라브라에서 시작된 개간지는 미래의 넵스키 대로를 형성했다. 두 길이 서로 독립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이 현재 보스스타니아 광장 지역의 고속도로 중단을 설명한다.[4]
이 대로는 즉시 수요가 많은 주요 고속도로가 되었고, 수로 장애물 위에 다리를 건설한 후 구 도로를 완전히 대체했다. 큰 전망은 약 4.5km 길이였고 폭은 약 20m이었다.[1] 1720년에 모이카를 가로지르는 나무로 된 도개교 그린 다리가 세워졌다.[5] 1715년 표트르 1세 황제는 "분수강의 빅 네바를 가로질러 다리를 건설하는 전망이 있다."라는 칙령을 내렸고, 1716년 5월까지[1] 공사가 완료되어 폰탄카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건설되었다.[1]
2. 1. 2. 1725-1762년: 궁정 쿠데타 시대
1726년 상원 칙령에 따라 넵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가는 주요 도로가 되었다. 정부는 도로 개선과 청결에 투자했는데, 1720년대에는 해군 제독 정원을 따라 도로 초기 구간에 자작나무 4줄을 심고 돌을 깔아 조경했다. 1723년에는 러시아 최초로 오일 램프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나중에는 벤치도 설치되었다.[1]1721년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카를 프리드리히 공작 수행원이었던 챔버 준커는 넵스키 대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저녁 6시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는데, 처음에는 길고 넓은 길(해군 제독에서 멀지 않은 도로의 작은 부분)에 들어섰고, 그 끝이 거의 보이지 않아 대로라고 불릴 만하다고 했다. 그는 이 길이 불과 몇 년 전에 포로로 잡힌 스웨덴인들의 손으로만 만들어졌다고 언급했다. 길 양쪽에 심어진 3~4줄의 나무가 아직 작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길이와 깨끗함(포로로 잡힌 스웨덴인들은 매주 토요일 청소)은 매우 아름답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고 썼다. 그는 이 도로 끝에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건물인 해군 제독에는 이 대로와 정반대 방향으로 뻗어 있는 아름답고 꽤 높은 첨탑이 있다고 덧붙였다.[1]
18세기 초 분기 말까지 넵스키 대로에는 건물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몇 개의 작은 집, 모이카 강 모퉁이 오른쪽에는 미트니 드보르, 모이카 뒤에는 소금 창고가 있었다. 오늘날의 고스티니 드보르 부지에는 자작나무 숲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나무집으로 구성된 "페레베덴스키 정착지"가 있었다. 모이카에서 폰탄카까지 도로 왼쪽의 광대한 영토는 예카테리나 1세 여제의 소유였으며, 낮고 늪지여서 개발되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는 폰탄카 뒤에서 시작되었고, 오른쪽에는 아니치코프 정착지의 집들이 있었다. M. O. 아니치코프 중령 지휘 하의 해군 제독 노동자 대대 군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 대대는 1715년에 폰탄카를 가로지르는 나무 다리인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설했다.[1]
이 좁은 다리 뒤에는 1726년부터 나무 경비 초소가 있었고, 현재의 리고프스키 대로 노선을 따라 운하가 놓여 여름 정원 분수에 물을 공급했다. 더 나아가 영토는 숲으로 덮여 거의 개발되지 않았고, 건물은 수도원 근처에서만 나타났다.[1]
대로 건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723년 표트르 1세는 성당에서 해군 제독까지의 길을 예상되는 방식으로 '놓도록' 명령했다. 이 도로는 수직적인 지배적 요소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삼위일체 대성당에 인접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거리를 곧게 펴는 아이디어는 1730년대에 다시 등장했고, 경로는 현대의 곤차르나야 거리와 텔레즈나야 거리를 따라 그려졌다. 대대로의 원래 구간은 스타로-네프스키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중에 1760년대에 두 방향이 합쳐져 넵스키 대로가 현대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1]
1732년 안나 이오안노브나의 궁정이 모스크바에서 4년간 머물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면서 대로는 개조되었고, 두 개의 개선문이 세워졌다. 이 행사를 위해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물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카잔 대성당 앞 공원 부지에 미하일 젬초프 설계로 1733~1737년에 세워진 복된 동정녀 마리아 탄생 교회였다. 이 교회는 대대로를 따라 길게 뻗은 직사각형 건물로, 성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과 유사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1730년에 루터교 성 베드로 교회가 나타났고, 부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두 개의 대칭적인 주거 건물이 대로를 내려다보았다.[1]
18세기 초, 음영진 쪽의 모든 건물은 1736년 화재로 파괴되었다. 미트니 드보르에 불이 붙었고, 인접한 나무 건물로 번졌다. 몇 시간 동안 맹렬하게 타올랐고, 그 결과 해군 제독 근처의 여러 필리스틴 나무집 구역이 불탔다. 두 번째 화재는 1년 후에 발생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 대부분의 건물을 파괴했다. 그 후, 넵스키에는 더 이상 나무집이 건설되지 않았다.[1][6]
네바 퍼스펙티브는 전체 정착지의 레이아웃 변경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보즈네센스키 대로 및 고로호바야 거리와 함께 유명한 해군 제독 "삼지창"의 일부가 되었으며, 표트르 예로프킨 지휘 하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건물 위원회에서 승인되었다. 그 결과, 혼란스러운 레이아웃에 강력한 조직 구조가 적용되었고, 해군 제독 측에 도시 중심부의 지위가 최종적으로 굳어졌다.[7]
1739년부터 넵스키 대로에서 주요 석조 건물이 건설되었다. 엄격한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집은 Красная линия|적선 (도시 계획)ru에 주요 파사드를 표시하고 M.G. 젬초프가 개발한 표준 "모델" 도면에 따라 건설되었다. 높은 "지하실" 반층에 건설된 1층 건물로, 소박하게 처리되었다. 파사드의 중앙 부분은 다락방으로 강조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는 문이 있었다. 이 집들은 다양한 페디먼트와 다락방, 창문 배치, 필라스터의 그림, 플랫밴드 및 장식 세부 사항으로 구별되었다. 1730년대 후반~1740년대 초, 모이카와 폰탄카 사이의 고속도로를 따라 나타났다. 국무원 의원, 장군, 부유한 상인, 공장 소유주, 궁정가들이 토지를 인수했고, 곧 왕족과 그 측근들이 토지를 받아 궁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구조물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아니치코프 궁전으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를 위한 것이었다. 폰탄카에서 현재의 사도바야 거리까지의 부지에 전체 궁전과 공원 앙상블이 생겨났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정규 정원, 정자, 온실, 연못 및 덮인 통로가 있었다. 궁전 건설은 1741년 젬초프 도면에 따라 시작되었으며, 1750년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에 의해 완공되었다. 아니치코프 궁전은 오늘날까지 보존된 넵스키 대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1]
1740년대에는 모이카 강 모퉁이 부지에 바론 스트로가노프의 2층 집이 들어섰다. 1752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건축가 FB 라스트렐리 설계에 따라 스트로가노프 궁전이 광대한 안뜰과 함께 건설되었다. 라스트렐리가 왕족을 위해 지은 대규모 목조 겨울 궁전이 1755년에 근처에 세워졌다. 이 궁전은 두 개의 현대적인 구역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주요 파사드는 넵스키 대로에서 모이카에서 현재의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네바 강둑에 석조 겨울 궁전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의 임시 구조물이었고,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사망 후 해체되었다.
대로에 왕실 거주지와 귀족 궁전이 등장하면서 조경에 더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1756년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칙령에 따라, 시민들이 옷을 나무에 걸어 말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포장도로는 다양한 모양, 크기 및 색상의 돌로 포장되어 사각형, 삼각형 및 줄무늬를 이루었다. 18세기 말까지 폰탄카와 예카테리나 운하 제방은 화강암으로 치장되었고, 카잔스키와 아니치코프 석교가 놓였다. 자작나무가 제거되었고, 네프스키 관점은 더 넓고 널찍해졌다.[1]
1762년, 건축가 안드레이 크바소프가 이끄는 새로운 도시 계획 위원회가 등장하여 수도 중심부를 개선하고 개발을 간소화하기로 결정했다. 네바 관점을 따라 높이가 6 패덤(약 13미터)까지의 석조 주택이 "하나의 연속적인 파사드"로 일렬로 세워져야 했다. 집중적인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주로 이전에 비어 있던 부지와 파괴된 나무집 부지에 진행되었다. 건물의 높이는 2~3층으로 증가했고 고전주의는 바로크 양식을 대체했다.
이러한 첫 번째 예 중 하나는 네프스키와 모이카 모퉁이, 경찰 다리 근처에 있는 엘리자베스의 파괴된 나무 겨울 궁전 부지에 지어진 치체린 하우스이다. 해군 제독에서 볼샤야 모르스카야 거리까지 대로 왼쪽과 현재 사도바야 거리와 아니치코프 다리 사이에는 이전에 비어 있던 구역이 18세기 후반에 크바소프가 개발한 "모범적인" 프로젝트에 따라 필리스틴 주택으로 채워졌다. 1760년대에 지어진 그러한 집 두 채(8번과 10번)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다양한 종교의 다양한 교회가 나타났으며, 그 건설은 왼쪽에서 수행되었다. 1780년에는 건축가 유리 펠텐 설계에 따라 상트 카테리나 아르메니아 교회가 나타났고, 1783년에는 건축가 장-밥티스트 발린 드 라 모트 및 안토니오 리날디 설계에 따라 가톨릭 성 카테리나 교회가 나타났다. 이 교회 각각은 블록 뒤편에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붉은 선을 향한 두 개의 주거 건물로 양쪽에 둘러싸인 작은 안뜰이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수도의 주요 거리에 상업 기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730년대에는 현대 고스티니 드보르의 목조 전신이 나타났다. 공통된 높은 지붕 아래의 1층 쪼그리고 앉은 벤치는 앞쪽에 개방형 갤러리가 있으며 대로를 따라 뻗어 있었다. 1748년 엘리자베스 페트로브나 여제 칙령에 따라, 상인들의 비용으로 건축가 라스트렐리 설계에 따라 나무 건물을 석조 건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으며, 나중에는 고전주의 스타일의 장-밥티스트 발린 드 라 모트의 프로젝트로 대체되었다. 고스티니 드보르는 1761년부터 1785년까지 건설되었으며, 붉은 선에서 들여쓰기되어 멀리서도 건물을 잘 볼 수 있었다. 다른 석조 무역 구조물이 근처에 나타났으며, 예를 들어 1787년에 개장한 실버 로우가 있다. 근처에 건축가 자코모 페라리는 넵스키 대로 모퉁이에 탑이 있는 시 두마 건물을 세웠다.[1]
18세기 말까지 폰탄카 너머의 고속도로 양쪽이 거의 건설되었다. 현재 지하철역 "플로샤드 보스스타니야"가 위치한 곳에는 1765년 건축가 Демерцов, Фёдор Иванович|표도르 데메르초프ru가 설계한 즈나멘스카야 교회가 나타났다. 현재의 옥티야브르스카야 호텔 부지에는 1743년부터 페르시아 샤가 왕실에 기증한 코끼리가 수용된 코끼리 드보르가 있었다. 나중에 이 자리에는 나무 오버-예거마이스터의 집이 있는 사냥꾼의 뜰이 있었다. 더 나아가 왼쪽에는 "새로운 마차 줄"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마차, 보행자 및 썰매와 기타 마차를 살 수 있는 석조 창고가 있었다. 오른쪽의 소위 "수레"에서는 오래된 수레, 마구, 그리고 "각 가정의 간단한 필요"에 맞는 기타 상품을 판매했다. 이 부분에서는 라브라 전에도 네프스카야 관점은 퍼레이드처럼 보이지 않았다.
18세기 말까지 알렉산더 네프스키 라브라 앙상블 형성이 완료되었다. 1790년에는 이반 스타로프 설계에 따라 삼위일체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그의 설계에 따라 라브라 입구 앞에는 둥근 광장이 만들어졌고, 남쪽에는 곡선형 돌담이, 중앙에는 게이트 교회가 있었다. 대로 측면에서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개의 2층 주택(현재 179번과 190번)으로 설계되었다.[1]
2. 1. 3. 18세기 후반
1990년대에 15번지, 55번지, 59번지, 68번지, 114번지, 116번지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자리에 역사적인 외관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재건축한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다. 건물들은 소유주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사고를 당하거나 불법적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건물 해체는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 2010년대 초 일부 건물의 외관은 다락방 건설(3번지, 64번지)으로 인해 훼손되었다.[1]1999년부터 2004년까지 넵스키 대로의 해군성에서 봉기 광장까지의 종합적인 재건축이 진행되었다. 보도에 화강암 판석 포장이 이루어졌고, 통신 및 엔지니어링 네트워크가 변경되었다. 2005-2006년에는 거의 모든 건물 외관이 예술적인 조명으로 장식되었다. 2008년에는 해군성에서 봉기 광장까지 대중교통 전용 차선이 분리되었다. 봉기 광장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까지의 보도에서는 아스팔트 포장이 화강암 포장으로 교체되었다.[14]
넵스키 대로는 대규모 축제의 장소이다. 새해, 전승절 (5월 9일), 도시의 날 (5월 27일) 및 기타 기념일에 폰탄카에서 궁전 광장까지의 대로가 보행자 구역으로 바뀐다.[15] 9월 12일, 성 신실한 알렉산드르 넵스키 공의 날에는 카잔 대성당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까지 도시의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전통적인 종교 행렬이 열린다.[16]
2. 2. 19세기와 20세기 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넵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제, 문화, 기술 발전의 중심지로서 큰 변화를 겪었다.19세기 후반, 절충주의 양식의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이 건설되었고, 1874년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이 문을 열었으며, 1873년 예카테리나 2세 여제 기념비가 세워졌다. 즈나멘스카야 광장은 1851년 니콜라예프스키 기차역 건물이 들어서면서 형성되었고, 1909년 알렉산드르 3세 황제 기마상이 세워졌다.
1863년 마차 철도를 시작으로, 1880년대 증기 철도, 1907년 트램, 1926년 버스 등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교통 역사가 넵스키 대로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모던 양식의 싱어 회사 건물(1902~1904), 엘리세예프 형제 상업 하우스(1903~1907), 메르텐스 건물(1911~1912) 등이 건설되었다.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넵스키 대로에는 보험, 주식회사 등 다양한 회사의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1917년까지 볼가-카마 상업 은행, 러시아-아시아 은행 등 국내 최대 은행들을 포함한 수많은 은행과 신용 기관이 넵스키 대로에 자리 잡았다.[1]
넵스키 대로는 "생명 동맥", "수도의 화려함, 사치스러움, 우아함의 중심"으로 불리며 도시의 비즈니스 및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고스티니 드보르와 같은 대형 쇼핑 센터에는 수많은 상점과 직원이 있었고, 넵스키 대로 상점들의 매출은 막대했다.
19세기 말, 즈나멘스카야 광장까지 종단 포장이 확장되었다. 1879년 P.N. 야블로치코프의 전기 가로등 실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백열등 조명, 1882년 러시아 최초의 전화 교환국 등 기술 발전도 넵스키 대로에서 이루어졌다.[1]
2. 2. 1. 19세기 초: 고전주의 시대


넵스키 대로의 최종 설계는 19세기 초반, 고전주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완성되었다. 1799년, 안드레이 보로니킨이 처녀 탄생 교회를 개조하여 성당을 건설하는 공모전에서 당선되었다. 카잔 대성당은 1801년부터 1811년까지 건설되었으며 1811년 9월 15일에 헌당되었고, 1813년에는 미하일 쿠투조프가 그 지하에 묻혔다. 1837년 12월 29일에는 보리스 오를로프스키가 제작한 미하일 쿠투조프와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 장군의 기념비가 카잔 대성당 앞 광장에 세워졌다.

1806~23년에는 해군성이 재건되었고, 동시에 주변 지역을 개선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1816~1818년에는 해자와 흙더미가 있던 자리에 세 갈래의 대로가 조성되었다.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설계한 앙상블이 나타났는데, 궁전 광장 앙상블은 개선문 참모 본부 건물을 통해 넵스키 대로와 연결된다. 예술 광장에 있는 또 다른 로시 앙상블은 주요 간선도로인 미하일로프스카야 거리와 연결된다. 세 번째 앙상블인 오스트로프스키 광장은 넵스키 대로를 향해 열려 있으며, 넵스키 대로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1828~32년에는 로시가 공공 도서관 건물에 거대한(길이 90m) 새 건물을 추가하여 조화로운 전체 구조를 만들었다. 동시에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이 광장 뒤편에 건설되었다.[8][9]
1830년대에 화가 바실리 사도브니코프는 아드미랄테이스카야 광장에서 아니치코프 다리까지 넵스키 대로의 양쪽을 묘사한 "넵스키 대로 파노라마"(1830–1835)를 제작했다.[10]

1800년 파벨 1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넵스키 대로의 모이카에서 폰탄카까지의 구간에 두 개의 대로가 조성되었다. 1832년에는 대로의 포장 도로가 육각형 나무 블록으로 포장된 것으로 교체되었다. 1806년에는 경찰 다리가 V. I. 헤세가 설계했다. 1841년까지 아니치코프 다리가 재건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넵스키 대로가 가장 편안한 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1]
2. 2. 2. 19세기 중반: 절충주의 시대
1830년대에 화가 바실리 사도브니코프는 아드미랄테이스카야 광장에서 아니치코프 다리까지 넵스키 대로의 양쪽을 묘사한 "넵스키 대로 파노라마"(1830–1835)를 제작했다.[10] 수채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길이가 거의 16m에 달하며, 석판으로 옮겨져 출판되었다. 1832년에는 대로의 포장 도로가 육각형 나무 블록으로 교체되었다. 엔지니어 V.P. 구리예프가 발명한 이 종단 포장은 유럽과 아메리카 도시에서 널리 퍼졌다. 측면 포장은 부드럽고 조용한 주행을 제공했으며 1924년 아스팔트가 교체될 때까지 넵스키 대로에 존재했다.[1]1800년 파벨 1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넵스키 대로의 모이카에서 폰탄카까지의 구간에 두 개의 대로가 조성되었다. 1802~1803년에는 린덴 나무 한 줄의 대로로 대체되었다. 2년 후, 건설 중이던 카잔 대성당 옆의 대로가 철거되었고, 1819년에는 대로 중간에서 완전히 폐기되어 새로운 화강암 인도 옆에 나무를 심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나무 심기는 184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니콜라이 1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철거되었고 모든 나무는 여름 정원으로 이식되었다. 일반적인 심기는 1897년에 복원되었다.[1]
19세기 중반까지 넵스키 대로는 가장 편안한 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1] 가난한 사람들은 넵스키 대로와 블라디미르스키 대로의 모퉁이에 모여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그들은 이곳을 "지저분한 증권 거래소"라고 불렀다. 폰탄카에서 멀어질수록 건물들의 부피와 높이가 줄어들었다. 1층에는 종종 꼭두각시 극장이나 밀랍 인형 전시실과 같은 저렴한 오락 시설이 있었다. 즈나멘스카야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넓은 마당과 채소밭이 있는 나무집을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건설 열풍은 상황을 바꾸었다. 고전주의 건축을 절충주의가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한 구조물에는 1846~48년에 폰탄카와 만나는 모퉁이에 건축가 안드레이 스텐치네이더가 설계한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로에는 아파트 건물이 건설되었다. 대로를 내다보는 1층에는 상점 창문이 있었다. "통로"라고 불리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상점이 대로에 나타났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스티니 드보르 맞은편에 있었다. 이 건물은 1846~1848년 사이에 건축가 R.A. 젤랴제비치가 설계했다. 은행 건물은 전문화된 구조물의 일반적인 유형이 되었다. 그 예로는 1896~9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아조프 상업 은행을 위해 건축가 B.I. 기르쇼비치가 건설한 62번지 건물이 있다.[11]
2. 2. 3.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자본주의 발전과 모더니즘
19세기 후반, 넵스키 대로의 건설 열풍 속에서 고전주의 건축은 절충주의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 폰탄카와 만나는 모퉁이에 건축가 안드레이 스텐치네이더가 설계한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이 1846~1848년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넵스키 대로에 건설된 마지막 사유 궁전이었다. 이 기간 동안 대로에는 임대 수익을 위한 아파트 건물들이 건설되었다. 대로변 1층에는 광학 기계 공방 "오스카 리히터" 상점 창문 등이 자리 잡았다.[11]새로운 유형의 상점인 "통로"가 등장했는데, 고스티니 드보르 맞은편의 건물이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1846~1848년 사이에 건축가 R.A. 젤랴제비치가 설계했다. 은행 건물 또한 전문화된 구조물의 일반적인 유형이 되었다. 1896~9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아조프 상업 은행을 위해 건축가 B.I. 기르쇼비치가 건설한 62번지 건물이 그 예이다.[11]
1874년에는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이 해군 광장 부지에 문을 열었고, 무성한 나무들이 해군성 건물의 외관을 덮었다. 1873년 알렉산드로프스카야 광장 중앙에는 예카테리나 2세 여제 기념비가 세워졌고, 주변에 정원이 조성되었다. 19세기 말에 나타난 카잔 대성당 근처의 광장은 잔디밭, 덤불, 중앙에 작은 분수가 있는 더욱 세련된 스타일로 장식되었다.[1]
자본주의 발전 기간 동안 넵스키 대로에서 유일하게 형성된 광장은 즈나멘스카야 광장이다. 18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철도와 건축가 콘스탄틴 톤이 설계한 니콜라예프스키 기차역 건물이 리고프스키 운하 모퉁이에 나타나면서 광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50년대 초에는 도시에서 가장 큰 세베르나야 호텔 건물이 건축가 A.P. 게밀리안에 의해 건설되었다. 광장의 다른 두 면에는 "세입자 가옥"과 호텔이 세워져 사다리꼴 모양을 갖게 되었다. 1909년에는 알렉산드르 3세 황제 기마상[1]이 중앙에 세워졌다.

1860년대 사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교통 역사는 넵스키 대로에서 시작되었다. 1863년 8월 27일, 니콜라예프스키 기차역(현재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궁전 광장을 지나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 거래소와 로스트랄 기둥까지 노선 1번 마차 철도가 개통되었다. 1880년대 후반에는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 스타로-넵스키를 따라 도시 외곽까지 증기 철도가 놓였다. 1907년 9월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에서 첫 번째 상트페테르부르크 육상 트램이 운행을 시작했고, 11월 11일에는 알렉산드로프스키 사드 – 발티스키 복잘 노선에서 첫 번째 버스가 운행되었다. 1926년에는 우리츠코고 광장(궁전 광장) – 자고로드니 대로 – 반란 광장 노선을 따라 대로에서 버스 교통이 재개되었다.[1][12][13]
20세기 초, 모던 양식이 인기를 얻었다. 1902~1904년에는 건축가 파벨 수조르의 프로젝트에 따라 예카테리나 운하 모퉁이에 싱어 회사의 상업 하우스가 건설되었다. 1903~1907년에는 건축가 G. V. 바라노프스키의 프로젝트에 따라 엘리세예프 형제(상인) 상업 하우스가 건설되었다. 1층에는 거대한 상업 홀, 2층에는 극장이 있었다. 1911~1912년에는 단단한 유리 외관을 가진 메르텐스 건물(21번지)이 건축가 M.S. 랄레비치에 의해 건설되었다.
아드미랄티 바로 옆,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모퉁이에는 건축가 M. M. 페레탸트코비치가 금융가 바벨베르크를 위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무역 은행(7/9번지) 건물이 등장했다. 1910년대에는 건축가 V. I. 반 데어 휴트의 상업 은행 "융커 앤 코." 건물(12번지), 건축가 V.P. 자이들러가 설계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립 상업 은행 건물(1번지) 등 유사한 건물이 더 세워졌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넵스키 대로에는 다양한 회사의 사무실, 보험 및 주식회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1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존재했던 64개의 은행 및 신용 기관 중 29개, 14개의 은행 하우스 중 10개, 29개의 은행 사무소 중 22개가 넵스키 대로에 있었다. 볼가-카마 상업 은행(38번지), 러시아-아시아 은행(62번지) 등 국내 최대 은행들이 넵스키 대로를 장악했다.[1]
넵스키 대로는 도시의 비즈니스 및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 가이드북에서는 대로를 "생명 동맥", "수도의 화려함, 사치스러움, 우아함의 중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업과 산업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화려하고, 귀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결합된 곳"으로 묘사했다. 가장 유명한 쇼핑 센터는 고스티니 드보르였으며, 19세기 말까지 일부 상점에는 가스 램프와 전기 공기 가열 대형 거울 창문이 있었다. 최대 300개의 소매점과 거의 5천 명의 직원이 있었다. "통로"에는 최대 60개의 상점이 있었고, 넵스키 대로 상점들의 매출은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상점뿐만 아니라 세입자 가옥과 호텔도 소유했다. 예를 들어, V.I. 솔로비요프 무역 파트너십은 4개의 상점(47, 59, 71, 76번지) 외에도 47번지에 팔킨 레스토랑, 볼샤야 세베르나야 호텔 및 51번지에 지점을 소유했다. 광고는 건물의 외관 전체를 차지하기도 했다. 맑은 날씨에는 넵스키 대로에 수도권 보 몽드의 인파가 몰렸다. 부유한 시민들을 위한 미용사, 재단사, 사진 스튜디오, 레스토랑, 카페, 빵집, 클럽 등이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종단 포장은 즈나멘스카야 광장까지 확장되었다. 1879년 4월 17일(29일)부터 5월 2일(14일)까지 알렉산드리아 광장에서 P.N. 야블로치코프의 파트너십이 조직한 전기 가로등 실험이 수행되었다.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12개의 전기 램프 중 4개를 켜고 끄는 실험을 보여주었다. 실험이 끝나는 날, 여제 기념비는 반사경으로 조명되었다.[1] 경찰 다리 근처 모이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최초의 발전소가 바지선에 설치되었다. 1883년 12월 30일에는 러시아 최초로 모이카에서 폰탄카까지의 대로가 백열등으로 조명되었고, 2년 후에는 폰탄카에서 즈나멘스카야 광장까지 전기가 공급되었다. 1882년 넵스키 대로에는 러시아 최초의 전화 교환국이 26번지에 등장했으며, 꼭대기에 설치된 타워에서 전선[1]이 모든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2. 3. 20세기: 소련 시대와 현대
소련 초창기(1918~1944년) 넵스키 대로의 이름은 프롤레트쿨트를 기리기 위해 잠시 "프롤레트쿨트 거리"('Ulitsa Proletkul'ta'ru)로 바뀌었다.[17] 프롤레트쿨트가 1920년경에 사라진 후, 이름은 다시 10월 혁명의 날을 가리키는 "10월 25일 거리"로 변경되었지만, 혁명 이전의 이름을 계속 사용한 도시 주민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레닌그라드 봉쇄가 끝난 1944년 1월, ''넵스키 대로''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복원되었다.[21]2. 3. 1. 레닌그라드 봉쇄
레닌그라드 봉쇄 (1941~1944) 기간 동안 넵스키 대로 북쪽의 일부 벽에는 "시민 여러분! 포격 시 이쪽 거리가 가장 위험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독일군의 포격으로 가장 위험한 지역을 경고했다.[18] 1962년, 시인 미하일 두딘의 주도로 넵스키 대로 210번 학교 건물에 비문이 재현되었다.[18][19] 이 비문과 도시 전역의 다른 사례들은 전쟁 기념물로 여겨지며 봉쇄 기념 행사가 자주 열리는 장소이다. 2019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 알렉산드르 베글로프는 넵스키 대로의 비문에 헌화했다.[20]2. 3. 2. 현대
1990년대에 15번지, 55번지, 59번지, 68번지, 114번지, 116번지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자리에 역사적인 외관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재건축한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다. 건물들은 소유주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사고를 당하거나 불법적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건물 해체는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1] 2010년대 초 일부 건물의 외관은 다락방 건설(3번지, 64번지)으로 인해 훼손되었다.[1]1999년부터 2004년까지 넵스키 대로의 해군성에서 봉기 광장까지의 종합적인 재건축이 진행되었다. 보도에 화강암 판석 포장이 이루어졌고, 통신 및 엔지니어링 네트워크가 변경되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거의 모든 건물 외관이 예술적인 조명으로 장식되었다. 2008년에는 해군성에서 봉기 광장까지 대중교통 전용 차선이 분리되었다. 봉기 광장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까지의 보도에서는 아스팔트 포장이 화강암 포장으로 교체되었다.[14]
넵스키 대로는 대규모 축제의 장소이다. 새해, 전승절 (5월 9일), 도시의 날 (5월 27일) 및 기타 기념일에 폰탄카에서 궁전 광장까지의 대로가 보행자 구역으로 바뀐다.[15] 9월 12일, 성 신실한 알렉산드르 넵스키 공의 날에는 카잔 대성당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까지 도시의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전통적인 종교 행렬이 열린다.[16]
3. 21세기: 현대의 넵스키 대로
1990년대에 15번지, 55번지, 59번지, 68번지, 114번지, 116번지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자리에 역사적인 외관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재건축한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다. 건물들은 소유주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사고를 당하거나 불법적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건물 해체는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 2010년대 초 일부 건물의 외관은 다락방 건설(3번지, 64번지)으로 인해 훼손되었다.[1]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넵스키 대로의 해군성에서 봉기 광장까지 종합적인 재건축이 진행되었다. 보도에 화강암 판석 포장이 이루어졌고, 통신 및 엔지니어링 네트워크가 변경되었다. 2005-2006년에는 거의 모든 건물 외관이 예술적인 조명으로 장식되었다. 2008년에는 해군성에서 봉기 광장까지 대중교통 전용 차선이 분리되었다. 봉기 광장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까지의 보도에서는 아스팔트 포장이 화강암 포장으로 교체되었다.[14]
넵스키 대로는 대규모 축제의 장소이다. 새해, 전승절 (5월 9일), 도시의 날 (5월 27일) 및 기타 기념일에 폰탄카에서 궁전 광장까지의 대로가 보행자 구역으로 바뀐다.[15] 9월 12일, 성 신실한 알렉산드르 넵스키 공의 날에는 카잔 대성당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까지 도시의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전통적인 종교 행렬이 열린다.[16]
오늘날 넵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간선 도로 역할을 한다. 도시의 쇼핑과 유흥의 대부분은 넵스키 대로에서 또는 넵스키 대로 인근에서 이루어진다.
이 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의 아드미랄테이스카야, 넵스키 대로, 고스티니 드보르, 마야콥스카야, 플로샤디 보스스타니야 및 알렉산드르 넵스키 광장 I 역에서 이용할 수 있다.
4. 주요 명소
라스트렐리 양식의 스트로가노프 궁전,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카잔 대성당, 아르누보 양식의 ''서점'' (원래 징거 하우스), 옐리세예프 백화점이 넵스키 대로의 대표적인 주요 명소이다.[23] 이 외에도 18세기 교회 6곳, 예카테리나 2세 기념비, 대고스티니 드보르, 파사주, 러시아 국립 도서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말 조각상이 있는 아니치코프 다리 등이 있다.[23] 넵스키 대로의 일부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23]
4. 1. 스트로가노프 궁전
라스트렐리 양식의 스트로가노프 궁전은 넵스키 대로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이다.[23]4. 2. 카잔 대성당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카잔 대성당이 있다.[23]4. 3. 징거 하우스 (서점)

아르누보 양식의 ''서점'' (원래 징거 하우스)이 있다.[23]
4. 4. 옐리세예프 백화점
옐리세예프 백화점[23]4. 5. 아니치코프 다리
말 조각상이 있는 아니치코프 다리는 넵스키 대로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이다.[23]5. 넵스키 대로와 러시아 문학
니콜라이 고골은 1835년에 발표된 단편 소설 "넵스키 대로"에서 이 대로의 열광적인 삶을 묘사했다.[14]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1866)과 ''분신: 페테르부르크 시'' (1846) 등 자신의 작품에서 넵스키 대로를 배경으로 자주 사용했다.[14]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 유명 작가들이 자주 찾았던 카페 레스토랑은 넵스키 대로에 "문학 카페"로 남아있다.[14]
니콜라이 고골은 1835년 단편 소설 "넵스키 대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넵스키 대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적어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그렇다. 이 도시는 넵스키 대로가 전부다. 우리 수도의 아름다움인 이 거리가 얼마나 빛나는가! 나는 창백하고 관료적인 주민 중 누구도 넵스키 대로를 모든 부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5살에 멋진 콧수염과 놀랍도록 잘 재단된 프록코트를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턱에 흰 머리카락이 튀어나오고 머리가 은 접시처럼 매끄러운 사람조차도 넵스키 대로에 기뻐한다. 그리고 숙녀들! 오, 숙녀들은 넵스키 대로를 훨씬 더 좋아한다. 누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넵스키 대로에 올라서자마자 산책 냄새가 난다. 어떤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일이 있더라도 넵스키 대로로 걸어 들어가면 어떤 일도 잊어버릴 것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나가지 않는 유일한 곳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체를 포괄하는 그들의 필요와 상업적 관심사가 그들을 몰아내지 않은 곳이다."[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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